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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

기도학으로서의 신학(2)

기도학으로서의 신학(2)

 

그러나 여진히 일부 사람들은 말씀과 기도를 서로 병치시키면서, 신학자는 기도하지 않는 자이고 신학에 무지한 자일수록 기도에 열렬하다는 편견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이 지나치게 주지주의적일 때 기도의 열정이 사그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이 틀린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성경존중사상은 인간 지혜의 탐구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 영감의 정신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초월적 계시관을 믿는 자라면, 성경은 생득적인 이해력으로 알 수 없으며 말씀 앞에 검손히 무릎을 꿇는 자에게만 열려지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감히 자기 지혜로 성경을 파보겠다는 만용은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개혁자들은 성경을 탐구하고 가르칠 때 언제나 성령을 의존했고, 해석의 문제에 부딪힐 때는 열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기도 의존적인 신학 태도는 개혁신학의 정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제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5년 7개월이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서 기도와 금식을 통해(매 회의 때의 기도회는 물론 매월 하루씩 금식기도를 올렸음) 그것이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그 교리가 얼마나 기도로 정위되어 있는가룬 반증 해 줍니다.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은 루터는 개혁이라는 중차대하고 벅찬 과업을 수행하는 중에도 "나는 너무 바빠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금언을 남길 만큼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책과 교리의 사람들이었던 청교도들이 동시에 얼마나 열렬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는가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적으로 개혁주의가 기도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 온 것은 왜곡이고 불명예입니다. 칼빈의 상징처럼 보여지는 "Cor meum tibi offero Domine"(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리나이다)는 그림은 그가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으며, 그러한 뜨거움은 무엇보다 그의 기도생활을 통해서였다는 것이 여러 문서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자취를 따르는 개혁교회가 기도가 약하다는 평을 받는 것은 불명예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없는 사변신학은 무신론이나다를 바 없고, 그러한 무(無) 기도의 신학 위에 세워진 교회는 필경 생명력이 약화되어, 결국은 칼빈이 신학의 구현장으로 삼았던 교회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 교회- 기도 를 서로 연계시킨 다음의 칼빈의 견해는 신학이 왜 기도학이 돼야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삼을 만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기도로 정위되어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있는 신의 계시를 취급하는 신학에 관여할 수 없다. 이러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진리들을 말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실상 신학을 하고 있는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신학이란 기도의 장소인 교회의 영역 안에서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모든 그의
강의 초두에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함으로써 이 인식을 확인했던 것이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신적 지혜의 비밀을 연구케 하시며 우리의 경건이 자라서 그를 영화롭게 하며 그것을 높일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동시에 그는 모든 강의를 기도로 끝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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