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방언의 사용법(고린도전서 14:13-19)

방언의 사용법(고린도전서 14:13-19)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있어서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말하면서 방언을 하는 자들이 방언을 교회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길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방언으로 덕을 세우는 방법


  바울은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 모두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써 교회에 필요한 것이지만 반드시 덕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14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방언으로 가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나의 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서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듣는 사람들도 그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기도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그 사람도 그 마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과 영을 구별시켰습니다. 방언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까지라도 알아 들을 수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열매란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한 마음의 응답으로 그 기도의 내용을 마음으로 깨달아 하나님께 마음으로도 같은 심정으로 간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방언의 내용을 모르고 방언을 말하게 되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에게 야만이 되고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에게 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야만이란 단어는 미개 족들의 생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당시 타민족에 비교한 헬라 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하고 심한 경우에는 '개 같은 자'로 멸시되었던 것과 같은 뜻입니다. 헬라 말을 모르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던 것처럼 방언을 말하면서 그 뜻을 모른다면 야만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로 바울이 이곳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12절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풍성하기를 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은사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은 칭찬 받을 만한 일이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왕에 은사를 원한다면 풍성 하기를 구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방언의 은사만은 말하는 자도 듣는 자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은사로서의 방언을 위해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은사도 있지만 그 방언을 통역해서 그 내용을 밝히 알려 주는 은사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면 통역의 은사마저 받아야 하므로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2. 풍성한 은혜에서 오는 온전한 방언


  15절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겸하여 통역의 은사까지 받는다면 그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이전에는 영으로만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 마음의 열매마저도 맺지 못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자도 없으므로 말하는 나도 듣는 사람에게 야만이 되고 듣는 사람들도 말하는 내게 야만이되어 왔기 때문에 덕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역하기를 기도하여 은사를 받으면 영으로 기도한 방언의 기도가 마음의 열매를 맺어 마음으로도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의 기도의 내용을 몰랐기 때문에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 내용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마음으로도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영의 찬미로도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 준말이 됩니다. 영으로 찬미한 찬미의 내용을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또한 마음으로 찬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방언에는 통역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영으로 축복할 때 그 축복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축복을 받는 자가 어떻게 아멘 하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 중에서 영이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에 대하여 16절에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무식하다는 말은 '이디오테스' 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란 뜻입니다.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교회에 결코 유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했습니다.


결론 : 통역이 따르지 않는 방언은 마치 분명치 못한 나팔을 부는 격이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방언을 해도 그 유익이 몇 마디 깨들을 수 있는 말을 전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남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 유익한 은사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